themestory

베너티 페어서점에서 이 잡지를 처음 봤을 때 그냥 패션지이거나 스타의
가쉽을 다루는 피플(People)과 비슷한 걸로만 생각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학회에 다녀오며
공항에서 ‘베너티 페어(Vanity Fair)’를 사온 걸 꼼꼼히 읽어 봤다.
정치를 다루는 패션지

명품광고와 헐리우드 스타 사진이 가득한 ‘베너티 페어’는 고급 패션지였다. 하지만 패션 기사는 거의 없었고 환경, 정치 그리고 대중문화를 몇 쪽에 걸쳐서 깊이있는 시각으로 분석했다.
2008년 5월호는 환경 특집으로 북극의 생태계 변화로 고통받는 북극곰이 주인공이었고, 4월호에는 여성 싱어송 라이터 죠니
미첼, 캐롤 킹, 칼리 사이먼의 삶과 음악세계를 자세히 소개했다. 한국에서 패션과 정치를 섞어놓은 잡지를 한번도 본 적 없다.
정치와 패션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인식되는 게 보통 한국인의 생각일 것이다. 뉴요커(New Yorker)처럼 문화와 정치가 공존하는 잡지는 가끔 본 적이 있었지만 패션지가 정치
기사를 다루는 것은 보기 드물다. 미국 잡지세계에서 정치는 아주 인기있는 화제거리다. 심지어 대중음악지
롤링스톤즈(Rolling Stone)도 버락 오바마 같은 정치인 특집으로 실기도 한다. 오바마는 거의 락스타에 버금
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긴 하다.

상류층의 생활을 판다

‘베너티 페어’에서 발견한 두번째 특징은 ‘계급’이었다. 이 잡지 광고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 질만하게도 렉서스, 벤츠, 프라다, 헤르메스, 롤렉스 등 대단한 명품광고 다. 이런 제품을 살만한 고객이 독자라면 상류층이다.
하지만 이 잡지는 상류층이 살 정도로 비싸지 않고 대중적으로 잘 팔린다. 역사적으로 중간층은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며 따라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무리한 소비를 해서라도 명품을 구매하는 중간층의 눈을 즐겁게 하는
상품과 모델이 ‘베너티 페어’에 있다. 품위있고 교양있는 상류층의 모습이 베너티 페어 광고나 사진으로 잘
드러나 있다. 반짝이는 사진 속 생활양식은 바로 중간층이 바라고 닮기 원하는 이상이다.
‘베너티 페어’의 기사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이 정도 지식을 알고 있으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을 수 있다. 천박하게 돈만 아는 졸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평화, 환경에 관심을 가진 의식있는 상류층이
되어야 하는데 기사는 그런 교육의 장이다. 위 사진의 마돈나는 환경과 저개발국가에 관심있는 연예인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 쓰인 지구본은 경매에 붙여진다. 그 수익으로 마돈나가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존경받는 상류층이라면 저런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베너티 페어’는 상류층의 근사한 삶의
이미지와 꿈을
중간층에게 판다. 이 잡지를 읽으면 계급적 동경과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상류층에 대한 풍자가 열망이 되다

베너티 페어


‘베너티 페어’는 17세기경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종교적 우의소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허영의 시장이란 뜻으로 사치나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을 풍자하기 위해 쓰였다.
1847년에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아예 ‘베너티 페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다. 마찬가지로 허영이
가득한 영국의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소설이었다.
‘베너티 페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잡지가 세 개나 되었다.
뉴욕 맨하튼에 기반한 유머 주간지가 ‘베너티 페어’라는 이름으로 1859년에서 1863년까지 간행되었다.
두 번째는 1868년에 나타나 영국사회를 위트있게 다룬 잡지로 1914년까지 발간되었다.
레슬리 경은 빅토리아 시대정신을 마치 거울보듯이 확인할 수 있는 잡지라며 ‘베너티 페어’를 칭찬했다.
세 번째가 현재의 ‘베너티 페어’로 ‘보그’의 소유주였던 콘데 네스트가 3000불을 주고 영국의 ‘베너티 페어’를
사버렸다. 당시 남성 패션지 ‘드레스(Dress)’와 이름 합쳐서 ‘드레스 앤 베너티 페어(Dress and Vanity Fair)’를 만들었지만 실패였다. 이 위기상황을 구해준 사람은 미국에 입체파를 소개할 정도로 식견있는 프랭크 크라우닌쉴드(Frank Crowninshield)였다. 그의 해답은 간단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잡지가 써야해요.
파티, 예술, 스포츠, 연극, 유머 같은 이야기로 채워야 해요.” 그래서 1914년 ‘베너티 페어’가 세상에 자신있게 등장한다.

이 잡지는 문학, 예술, 스포츠, 정치, 영화 그리고 상류사회에 관한 글로 유명해져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사회를 재는 척도가 될 정도로 대표적인 잡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1936년 ‘베너티 페어’는 폐간되었다. ‘베너티 페어’가 다시 복간된 것은 거의
50년이 흐른 1983년이었다. 레이건 시대의 경제적 호황과 사치스런 독자의 취향에 힘입어 ‘베너티 페어’는 화려하게 복귀한다. 최고 수준의 사진작가와 기고가를 영입하여 고품격 잡지로 거듭난 ‘베너티 페어’는 제 2의 르네상스를 맞이 한다. 매년 헐리우드 스타특집을 발행한다. 이 사진만 봐도 그 해의 최고 스타는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베너티 페어 

‘베너티 페어’는 정치기사를 쓸 뿐아니라 실제 정치적 행동을 하기도 했다. 헐리우드 작가들이 부당한 저작권
분배를 비판하며 2007년에 파업을 했다. 작가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서 80회 오스카 ‘베너티 페어 파티’를 취소했다.
베너티 페어 파티는 오스카 파티 가운데 가장 많은 스타들이 참석해왔다. 상류사회에 대한 풍자를 단번에
열망으로 바꿔놓은 그 힘은 대단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상품, 아름다운 모델과 배우, 현란한 문장력과
논리로 무장한 기사, 그 어느 것 하나에 쉽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런 허영이라면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상류층 문화라는 고급 음식을 먹기 좋기 요리해서 예쁘게 그릇에
담아내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즐길 수 있게 한 잡지가 바로 ‘베너티 페어’다.
‘베너티 페어’는 상류층의 교양지이거나, 상류층을 꿈꾸는 중간층 이하의 사람들의 욕망지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단순히 쿨해보길 원하는 패션지일 수 있다. 아니면 모두가 다 해당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허영은 미덕이 되어 버린 것일까? 21세기 살아남기 위해서 허영은 다른 계급에 대한
연민이나 인류애라는 다른 미덕과 결합하여 진화하고 있다.
 

베너티 페어

 

글쓴이 : 류동협
출처 : 류동협의 맛있는 대중문화
2008/04/17 02:52 2008/04/1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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